이번 봄에는 조선왕조시대에 지어진 5개의 고궁들로 투어를 다녀왔었다.
사실 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중고등학생들의 봄소풍장소로 많이 지정되어 와서, 자주 가 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들어 고려말~조선시대 역사서를 많이 읽고 난 다음에 다시 찾아보니 느낌이 좀 색달랐다.
최초 정도전과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울 당시에 처음 지었던 경복궁부터,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 3대 임금으로 제위를 할 때부터 사용한 창덕궁, 그리고 조선시대의 슬픈 역사에 의해 임금이 임시로 거처를 옮겨서 사용한 이궁들, 성종처럼 위에 모셔야 할 할머님들이 많거나, 궁의 전각이 모자랐던 시절 추가로 지었던 그 외의 다른 고궁들 역시 각자 그 역사의 느낌이 그대로 잘 남아 있었다.
경복궁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 정도에 이르르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정궁으로 사용되었던 만큼, 확실히 품격이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강녕전의 위엄이나 교태전의 섬세함과 우아함은 다른 어디와도 비길 바가 못되는 느낌이 든다.또 여자들에 대한 세삼한 배려도 돋보이는게 자경전(대비전)에서는 정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돌담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보물로 지정된 십장생모양의 굴뚝 역시 유명하다.
<경복궁 자경전의 예쁜 담벼락>
그러다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오랜 시간동안의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주무대였던 창덕궁을 버리고 터만 남은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지금 보고 있는 경복궁은 창덕궁을 기반으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궁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일본에 의해서 명성황후 시해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이나 경운궁(덕수궁)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폐위되었고, 그 뒤를 이은 순조는 다시 창덕궁에서 마지막 생활을 보낸다.
<덕수궁 내 고종이 차를 마시던 정관헌, 최초의 서양식 건물>
고궁을 돌아보다보면 너무 쓸쓸하고 가슴 아픈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창덕궁 뒤 후원의 규장각 터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당시 정조가 느꼈을 흐뭇함이나, 또 정조를 그렇게나 담고 싶어했다는(실제로 영특하고 책 읽기를 좋아해서 실제 정조와 많이 닮았었다고 하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 순조 다음 임금이 되지 못했다)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가 후원의 조용한 곳에서 할아버지를 본받아 열심히 공부를 하기 위해 지었다는 소박한 건물들(정조의 검소함까지 닮은 것인지, 세자가 거처하면서 공부를 한 건물이라고 보기에 엄청 소박한 건물들이 놀랍다), 또 숙종이 자신의 아름다운 장희빈을 위해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아름다운 애련지와 애련정, 임금들의 풍류를 느끼게 해주는 옥류천이나 또 백성들을 생각해 직접 농사를 짓고 누에를 키웠던 모습이 남아 있는 것들을 보면 흐뭇하고 기쁘기 그지 없다.
<기오헌,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던 공간>
게다가 경복궁에서 고종이 어떻게든 피신시키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군사를 이끌고 한 나라의 황후를 처참히 시해하고(닮은 시녀들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또 그 이후 불을 지르는 등 시신까지 철저히 훼손하는 일이 일어났다. 최근 명성황후의 시해장소로 잘 알려진 건청궁이 재건되었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건청궁을 돌아보다보면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앞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안타까운 다툼, 또 그 사이에 많은 열강들이 서로 이제 막 개방한 조선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발톱을 이리저리 내 두르며 싸우던 사건들, 그리고 힘이 없어서 어처구니 없고 격분할 만한 일들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선조들, 결정적으로 그 중 일본이 했던 처참한 행동들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몹시 씁쓸해진다. (힘없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이라면 모두 다 느낄 법한..) 건청궁의 동궁전은 심지어 한 일본인이 그 모양 그대로 뜯어 일본에 가져 가서 자신의 별장으로 개조해 썼으나,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나면서 다 불에 다 타버렸고, 결국 우리의 요구에 의해서(삼성재단에서 돈을 냈다고 하네요) 다 불타고 남은 초석들만 원래 세자궁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비운의 조선말기를 함께한 경복궁의 건청궁>
또, 고종을 억지로 폐위시킨 일본은 이후 순조를 억지로 창덕궁으로 데리고 왔으며, 순조가 살고 있던 창덕궁을 비하시켜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켜 부르게 하였고(뭣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거의 정궁에 해당하는 궁궐을 정원 정도로 칭하는 것인 비원이라는 이 이름이 일본이 일부러 격하시켜 부르게 한 것임을 모르고 아직까지도 비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또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부르게 하였다. 또한, 경복궁을 정궁이라고 하면서, 경복궁 안에 있던 아름답던 건물들을 뜯어내고 일본의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 등을 자기들 마음대로 지어버렸다. (실제로 경복궁 내 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와서이다.)
실제로 창덕궁 뒤의 후원을 가보면, 비싼 입장료(5000원임!)가 아깝지 않을 만큼 정말 조선시대의 임금들의 풍류, 멋과 아름다움, 그리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그 아름다운 곳들 마저도 일본이 제맘대로 훼손시키고 자기들 스타일로 바꿔놓고 이용했다는 사실에 보다보면 치가 떨린다. 무엇보다 후원 부용지 앞의 정조가 만든 2층짜리 전각 주합루는 1층은 그 유명한 규장각(왕실 도서관)이었고, 2층은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일제시대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여기에서 술판을 벌이는 연회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와 주합루, 그리고 왕의 문 어수문과 서쪽의 서향각>
또 덕수궁(원래 이름은 경운궁)은 최초 세조가 남편(의경세자)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며느리인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위해 지어준 개인 사저였지만, 나중에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가 창덕궁을 재건할 때까지 잠시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된 곳이다.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해, 창덕궁이 다 지어지고 난 후에 거처를 그리로 옮겼다. 그리고 이후 광해군이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바로 이곳 경운궁에 유폐시키며, 궁궐이 서쪽에 있다 하여 이곳이 서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반정을 일으킨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 시키며 인목대비가 있는 이곳에 찾아와 이곳에서 즉위를 하였으나 며칠 후 창덕궁으로 인목대비와 함께 옮겨갔다.
고종도 이곳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종이 을미사변(명성황후의 시해) 이후 일본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이곳은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1904년에 화재로 전각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 아버지 고종이 헤이그 밀사 파견의 여파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폐위되고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가 덕수였기 때문에 덕수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일본은 즉위시킨 어린 순종을 아들과 아버지 사이를 멀리 떨어트려 놓아 순순히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창덕궁에 거처하게 했다.
덕수궁은 고종시대에 사용되었던 건물로 궁궐이면서도, 석조전 등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양식이 들어가져 있는 색다른 느낌이 드는 궁궐 중 하나이다.
<덕수궁 석조전, 고종이 대한제국 부흥의 꿈을 안고 건축한 근대건축물>
경희궁은.. 사실'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단지 이름 때문에나 알지, 서울 시내에 이런 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은 아닌것 같다, 그 이유는 사실 경희궁은 일제 강점기때 거의 다 허물어버리고 이 자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만들고, 또 해방 후에는 서울 고등학교가 위치하는 등 경희궁의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후 일부를 복원하였지만 온전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해서 궁궐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많이 잊혀져 버려서인듯 하다. 서울고의 이전 이후 이 부지가 현대건설에 매각되고, 이후 복원을 시도하였으나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 문제를 제기해 복원이 중지되고, 이후 이 경희궁 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많이 훼손이 되었다. 하지만 2013년에 경희궁지 정비계획을 세운 이후, 2014년부터 2차 복원을 계획중이며,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고,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는 등 일부 궁장이 복원될 예정이다.
그렇지만, 의외로 광해군 15년에 지어진 이 경희궁(원래 이름은 경덕궁)은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고,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3대 궁궐로 불리울 만큼 큰 궁궐이었다. (총 100여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고 하고,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 불렸다.)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인조 역시 창덕궁에서 기거했으나, 이후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 버리자 인조는 인목대비와 함께 이 곳으로 이어하였고, 자신이 폐위시킨 광해군이 공들여 지은 이 곳의 첫 주인이 되었다. (이후에 이곳은 서궐로 불리었고, 창덕궁은 동궐로 불리우며,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이곳에서 숙종이 태어나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고, 숙종, 영조, 순조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서 그 긴 재위 기간의 절반 정도를 보낼 정도로 좋아하였다. 또한, 세손시절의 정조 역시 경희궁에서 머물었고, 이곳 승정문에서 즉위를 하였다. 최근 영화 [역린]의 장소인 정조 1년 자객이 들었던 곳 역시 이곳 존현각에서의 일이다. 경희궁이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나중에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에 있으면서 석교를 놓아 경희궁을 오가기도 했었으나, 일제에 의해서 총독부 학교를 세우면서부터 철저히 파괴되어버렸다.
경희궁에 가 보면 복구된 건물이 매우 적고, 터만 남아있어 그런지 씁쓸함이 배가 되지만, 공원처럼 일반에 개방되어 있어 가족단위로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희궁 승정전으로 들어가는 승정문>
창경궁은 최초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던 곳으로, 성종 14년에 많은 어른들(세조 비 정희왕후,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을 모시기 위해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의 전소 외에도, 잦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창경궁은 창덕궁과 인접하고, 종묘와도 연결되어 있어 조선왕조에 중요한 무대로 사용되어졌으나, 순종 즉위 이후 일본에 의해 철저히 훼손되어졌다. 창경궁 내부 궁중, 담장 등을 전부 훼손하고 일본식 건물들을 세웠으며,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고, 임금님이 농사를 짓던 권농장 자리는 큰 연못으로 파 버린 후 정자를 세웠으며,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 시켰다.
창경궁에는 아직 대온실이라는 이름의 하얀색 철제와 나무로 만들어진 유럽스타일의 온실 화원이 존재하고 있다. 순종 때 일본인에 의해 지어졌는데(딱 보면 건물 앞 정원 손질이나 건물의 외양 모두에서 일본 스타일의 느낌이 팍팍 나는데, 왜 철거가 안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이 건물의 특이성 등으로 인해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창경궁의 대온실>
창경궁에는 다양한 역사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곳의 선인문에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같혀 죽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영조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세자가 완벽주의자에 철저한 자기관리를 원하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그것도 영조가 좀 건강하고 좀 오래 살았나...) 궁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괴롭게 지내다 결국 사사 당하는 그 주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뭐 이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처소인 사경정을 사도세자의 사당이 보이는 곳에 지어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또, 누구나 다 기억할만한 숙종 시대의 절세 미인(절세 미인으로 알려진 많은 여인들이 있지만, 역사서에서 아름답다고 적혀있는 사람은 장희빈이 유일하다나 뭐라나)인 장희빈이 거처하도록 했고, 죽음을 맞이 했던 취선당도 이곳에 있었다. (다만, 영조시대 때 불타버렸다)
원래 창덕궁의 후원, 종묘는 자유관람이 안되고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관람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대략 5월 첫째주와 11월 첫째주 정도가문화재청에서 지정해 내국인 고궁 입장료 할인행사(50% 할인?)와 더불어 자유관람을 해준다. 이번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이와같은 할인 행사를 이용하여, 고궁들의 많은 곳을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창덕궁 후원은 입장료 할인이 안됨) 자유관람도 좋았지만, 흔치않은 창덕궁의 인정전에 직접 들어가서 순조 시절의 커튼이나 샹들리에(그당시 당연히 발전기가 없었을 테니 제대로 켜진채 유지되지 않고 깜박거렸어도 심지어 전구가 있었다! 에디슨이 전기를 개발(1882년)한지 단 5년만(1887년)에 최초 경복궁의 건청궁에서부터 전구를 달아 점등식을 했던 것이다! 이에 에디슨이 매우 감격해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다 켜지다니, 꿈만 같다'라고 했을 정도.)를 보거나, 천장에 조각되어져 있는 봉황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인정전 안에 들어와 아래에서 올려다본 천장의 봉황무늬와 근대식 조명기구인 전등>
내가 기억하기로...
경복궁과 창덕궁은 입장료가 3000원, 덕수궁과 창경궁, 종묘는 입장료가 1000원, 경희궁은 무료이고, 창덕궁의 후원은 입장료가 5000원이다.
그리고 1달 이내 사용 가능한, 5대궁(창덕궁의 후원을 포함)과 종묘의 통합관람권이 만원이니, 10월 말 정도부터 단풍이 아름답게 질 때, 통합 관람권을 사서 다시 한번 5대궁을 돌아보는 투어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청소년(24세 이하)이나 경로(64세 이상) 할인이 된다.
덕수궁은 시청역, 경복궁은 광화문역, 혹은 경복궁역,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안국역, 종묘는 종로3가역에서 가깝다.
고궁에 가기 전에 조선시대 역사책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가서 어떤 왕이 언제 이 곳에서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떠올리며 둘러보게 된다면 고궁을 바라보는 재미가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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